한 리크루팅 에이젼시와 인터뷰를 가졌다. 내 경력은 대부분 웹개발 관련한 내용이었는데, Java를 가지고 몇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에이젼시 직원은 3.5년 정도되는 기간의 내 Java 경력을 가지고 어느 회사와의 인터뷰를 주선해 주었다. 너무 자신이 없어서 미리 에이젼시에게 언질을 해두었지만, 내 예상대로 인터뷰는 엉망진창이었다. J2EE나 Spring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상태여서 많은 질문에 해본적 없고 모른다라고 대답해야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에이젼시에게 전화를 걸어서 참담했던 인터뷰 내용을 얘기하며 약간의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실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해본 적도 없는 분야의 인터뷰를 왜 내가 나가야 했을까? 에이젼시 말만 믿고 선뜻 따랐던 내 미련함을 탓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황가레이 구인을 진행하던 에이젼시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심 기대했었던 터라 더욱 긴장이 되었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최종 후보자 2명에 대해 회사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했다. 끓어올랐던 흥분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최종 결정을 위해 한번 더 테스트를 제안한다는 것이었다. 승낙하지 않으면 다른 후보자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의미였다. 코딩 테스트였는데, 코딩 중간 중간과 결과 중간 중간을 빈칸으로 만들어서 채우는 문제였다. 인터넷 서비스 뿐만 아니라 VoIP 기반의 전화 서비스도 하는 터라, 무슨 전화 번호 지역 분류 같은 코드였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24시간을 준다고 했는데, 문제를 받자 마자 대충 결론 추론 및 역산에 의한 검증을 하면서 뚝딱 뚝딱 채워서 결과를 보냈다. 사실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걸 결정하려고 또 테스트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조금 그랬다. 한 달 가까이 기다린 결과가 무승부여서 더 그랬던 거 같다.
지친 마음도 달랠 겸해서 나선 코로만델 여행 중에 들른 한 여행지에서 느닷없이 전화 한통을 받았다. 신생 한인 호스팅 업체의 이사(?)라는 사람과 잠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뜬금없이 영어 테스트를 전화로 한다며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과 그다지 조용하지 않은 야외에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사전 협의없는, 전화에 의한 영어 테스트를 받고 나니 짜증이 텍사소 물떼처럼 몰려왔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 이사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다시 왔다. 해당 업체 대표와 인터뷰를 하자는 거다. 목구녕이 포도청인지라 언짢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어느 커피숍에 시간 맞춰 나갔다.
해당 업체는 이제 막 시작했는데, 개발하던 사람이 그만두면서 그를 대체할 다른 개발자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업체의 대표는 모 업체를 이미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이사라던 사람은 그 과정을 도와주는(?) 거라고 했다. 이것 저것 질문과 대답이 오가다가 연봉 얘기가 나왔다. 한국에서 받던 연봉을 묻더니, 그 정도를 NZ 달러로 줄 수 있다는 거다. 즉 한국에서 1000만원 받았다면, 뉴질랜드 달러로 1만불 주겠다는 거였다. 곤란하다고 했더니 최저 희망 연봉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막상 얘기했더니 대표라는 사람이 얼굴 표정이 바뀌면서 갑자기 영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영어가 모자라서 일을 혼자서 처리못할테고, 그로 인해 통역을 고용해야 하는데 누가 그 돈(내가 얘기한 최저 희망 연봉)을 주겠냐는 거다. 원하는 그 연봉 받기는 거의 불가능이고 노느니 자기네 회사가 주는 월급이라도 벌면 수당도 받으면서 그럭저럭 생활이 될테고, 그러면서 현지 경력도 쌓는 게 좋지 않겠냐는 충고섞인 제안이었다. 이쯤되면 판이 깨지고도 벌써 깨졌다 싶어서, 통역을 고용해야 할 정도의 영어실력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셨고, 그걸 더 보강한 후에 구직활동을 하는 게 낫겠다는 완곡한 거부의사 표현을 함으로써 인터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굶어죽더라도 어려운 사정에 처한 이민자들에게서 피를 더 뽑으려고만 하는, 코딱지만한 한인 업체에는 절대 지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후로도 그 업체는 교민들이 많이 가는 인터넷 사이트에 한동안 구인광고를 계속 올려댔다. 많은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경력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제시할 연봉은 고작 생활비 밖엔 안되는 수준이면서 말이다. 게다가 인터뷰 도중에 연봉 얘기, 그것도 구체적인 금액을 가지고 연봉 얘기를 해본 건 정말 처음이었다.
씁쓸한 경험 뒤에 걸려온 에이젼시의 전화 한 통. 자바 개발자 인터뷰를 추진했던 그 에이젼시였다. 지난번엔 미안했다면서 이번에는 Easygoing라고 했다. 다시 한번 겁(?)을 줬는데도 자신있어하길래 인터뷰를 약속해주었고 얼마 뒤에 인터뷰 날짜와 장소를 통보받았다. 인터뷰가 하루 종일이라고 했다. 살 던 곳에서 꽤나 떨어져 있는 회사였다. 버스를 1번 갈아타고도 꽤나 걸어가야 했다. 아침 일찍 시간 맞춰 가서 미리 가글도 하고 수분 보충도 해뒀다. 9시가 되자 누군가 와서 나를 데리고 회의실 같은 곳으로 갔다. 회사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엔 DB 설계 테스트가 이어졌고 끝난 이후에는 그 회사 직원 2명과 같이 회사 밖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황가레이 업체의 구인을 진행하던 그 에이젼시였다. 드디어 회사가 결정을 내렸고, 최종 후보자는 나라고 했다. 나는 결과를 30분 이내에 제출했고 정답률 95%(한 문제 검산을 잘못 한듯 했다)였고, 다른 후보자는 정확히 24시간만에 제출해서 100% 정답이었다고 했다. 왜 나를 선택했느냐고 되묻자, 30분만에 답안을 모두 제출했으며, 실수라고 보여지는 5%의 오답을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하고 있던 인터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이젼시에게, 지방으로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아내와 얘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그날 저녁까지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타당해보이는 이유때문이었는지 에이젼시는 그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이후엔 개발 관련 인터뷰와 일반 인터뷰가 이어졌다. 오랜 인터뷰 동안 땀이 정말 많이 났다. 마지막은 Paper coding 테스트였다. 해당 테스트를 진행하던 직원에게 답안지를 내며 한 가지 요청을 했다. 사실 다른 회사로부터 잡오퍼를 방금 받았는데, 만일 이 회사가 나를 채용한다면 나는 이 회사에 꼭 다니고 싶다. 그러니 가부 결정을 서둘러 주었으면 한다고 약간의 호언장담 같은 부탁이었다. 모든 인터뷰를 마치고 회사 밖을 나서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몰아쳤다. 한참 더운 여름의 낮 날씨였는데,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도중에 만난 그 잠깐의 소나기를 맞고 옷이 흠뻑 젖었다. 불길했다. 안될꺼야, 회사를 협박하는 구직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건방져보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한 후 흥분한 마음을 달래며 영어 공부도 하고 졸기도 하는데 느닷없이 휴대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날 인터뷰를 봤던 회사의 개발 매니져였다. 연봉을 포함한 모든 과정이 거의 끝나가는데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2 시간 정도 후에는 다시 전화가 와서 스캔한 고용계약서를 이메일로 보냈고, 종이로된 원본 계약서는 Courier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알았다고 담담히 대답하며 전화를 끊고는 소리없는 환호를 질러댔다. 황가레이 업체쪽 에이젼시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른 회사로 가기로 했다고 얘기를 해야 했다. 아마 최종 후보자 중 다른 이에게도 좋은 일이 되었을 거 같다.
그 날 저녁 와이프는 늘 그랬던 것처럼 녹초가 되어 퇴근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강 이랬던 거 같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뭘 먼저 듣고 싶냐고. 와이프는 늘상 좋은 걸 나중을 위해 아껴두니까, 당연히 나쁜 소식을 먼저 물었다. 와이프가 가고 싶어하던 황가레이 지역 업체에게서 잡오퍼를 받았는데 안 가기로 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럼 좋은 소식은 뭐냐고 묻는 질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오클랜드의 다른 업체를 선택했다고 했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Job hunting은 그렇게 끝났다.
와이프가 영주권을 따기 까지, 내가 직장을 잡기 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느끼는 단 하나의 생각, 그것은 기회는 여기 저기 널려 있지만 준비된 사람만 그것이 기회라는 걸 알아채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라는 점이다.
와이프는 뉴질랜드 정규 간호사가 되기 위한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왔지만, 필요한 영어 점수를 채우기에는 실패했다. 포기하기 직전에 휴가를 몰아써서 뉴질랜드 북섬 남섬을 같이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내가 한번만 더 해보자고 설득해서 한 텀을 더 학원에 등록했다. 그 때까지 해왔던 게 아쉽지 않도록 2년을 채우자고 설득했었다. 그 마지막 텀에, 그전에 와이프가 자원봉사를 했던 disabled adult 시설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뽑힌 건 다른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러 한참 후에 다시 걸려온 그 시설의 전화. 이번에는 진짜였고, 그렇게 워크비자를 땄고, 나를 뉴질랜드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영주권을 위해서는 영어점수가 필요했고 딱 1번의 기회를 부여받았고 피말리는 공부속에 결국 성공했다. 10년 넘는 간호사 경력, 그 바쁜 생활속에서 따두었던 사회복지학과 석사 졸업장과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더불어 자원봉사 경험, 간호사 등록을 위해 공부했던 영어실력이 어울어졌기엔 잡을 수 있던 기회라고 생각된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수 많은 좌절과 실패,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그 길고 긴 6시간 넘는 테스트와 인터뷰들을 자신감있게 해내지 못했을 거 같다. 첫 전화 인터뷰에서 느꼈던 무서움, 첫 Paper coding에서 느꼈던 무너진 자존감, 첫 대면 인터뷰에서 느낀 부족한 영어 능력 등이 다시 부메랑으로 나에게 돌아오면서 그 기회를 가져다 준 거 같다. 물론 운 99%, 내 실력 1%임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99%의 운도, 내 1%의 실력이 없었다면 아마 무의미했을 것 같다. 다시 되돌아봐도, 만약, 황가레이건이나 지금 다니는 직장의 인터뷰가 첫번째, 혹은 두번째 인터뷰였다면 나는 거기서 모두 실패했으리라 확신한다. 백번이 넘는 입사 지원, 수 십번의 전화 인터뷰, 십여번의 리크루팅 에이젼시 인터뷰, 열 번 가까운 온라인/Paper Coding 등의 테스트, 열 몇번의 기업과의 대면 인터뷰를 거치면서 변화된, 준비된 상태였기에, 찾아든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실패와 좌절이 두려워 확실해 보이는 것만, 될 거 같은 것만 했다면, 덜 좌절하고 덜 실패했을 수 있을 수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동안 사용했었던 조그마한 수첩과 블로그에 짬짬이 적어두었던 기록들을 보며 기억을 뒤새기며 이 취업기를 써내려왔다. 장황하게 내가 거쳐온 과정을 늘어놨으니 실제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 또한 내놔야 할 거 같은 부채감이 든다. 그래서 다음에는 좀 더 실전에 가까운 내용들을 적어봐야 겠다. CV와 Cover letter, 전화 인터뷰 대처 방법, 내가 치뤘던 각종 테스트들, 뉴질랜드 이민을 위해 IT종사자가 선택 가능한 방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20개월의 직장생활에 대해서, 내가 경험한 선에서 기술해보려고 한다.